토종 밀 시장, 일본은 지키고 한국은 버렸다

특별취재팀  / 기사승인 : 2022-11-08 11:3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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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품종 개발로 맛·품질 높이자 소비 늘어나
日, 정부가 공급가 결정…韓, 민간에 사실상 일임
보조금 제도도 식량안보 시대 15%대 자급률 비결
2~3개월치 비축분 활용…동맹국과 비상조달도 협의
 

▲ 10월5일 일본 도쿄 다이토구 마이 바스켓 슈퍼마켓 밀가루 코너. 진열된 17종 밀가루 제품 가운데 7종에 일본산 밀이 원료로 쓰였다. [서창완 기자] 

일본 도쿄 긴자의 마츠야 백화점 지하 1층엔 토종밀 전문 빵집 '브레드 스토리(Bread Story)'가 있다. 매장에 들어서자 홋카이도 산 밀로 만든 빵 사진이 눈에 띈다. 이 가게가 일본 토종 빵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뭘까. 지난 10월5일 현지에서 만난 점원 유즈키 미하라(28)의 대답이 흥미롭다.

"일본 토종밀은 단맛, 맛의 깊이부터가 다릅니다. 한번 드셔 보세요. "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 대부분 밀을 수입한다. 하지만 자체 생산규모도 상당하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 밀 자급률은 0.8%, 일본은 15%다.

2020년 기준 밀 자급률, 한국 0.8%, 일본 15% 

한·일 양국은 1960년대까지 밀 자급률이 비슷했다. 하지만 1980년대를 기점으로 양상이 바뀐다. 한국은 1960년 33.9%였던 자급률이 1970년 15.4%, 1980년 4.8%를 거쳐 1990년에는 0.05%까지 떨어졌다. 반면 일본은 1960년 39%였던 자급률이 1975년 4%로 최저치를 찍은 뒤 1990년 15%로 회복됐다.

일본은 1960년 1인당 25.8kg였던 밀 소비량이 1975년 31.5kg까지 올랐다. 2020년(31.7kg)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1965년 1인당 13.8kg였던 밀 소비량은 1975년 29.5kg까지 급격히 올랐다. 2020년(31.2kg)과 비슷하다.

이러한 밀 소비량 증가분 상당부분을 수입산이 채웠다. 일본 밀 수입량은 1960년 261만3000t에서 1975년 568만1000t으로 2.17배 늘어난다. 토종 밀 생산량은 153만1000t에서 24만1000t으로 급감했다. 일본에겐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 일본 요코하마항에 위치한 대형 제분사 니폰제분 소유 밀가루 창고. [서창완 기자]

일본은 위기를 쌀 대신 밀을 재배하면 보조금을 주는 '전작(轉作)장려금 제도'로 극복했다. 1970년대 쌀 과잉 현상이 나타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우리나라는 쌀 부족을 겪었다. 그 빈자리를 수입밀로 대체하는 '혼식장려운동'을 펼쳤다. 값싼 수입밀이 쌀을 대신하는 사이, 국산 밀 생산지는 사라졌다. 1960년대 20만t을 넘었던 국산 밀 생산량은 1973년 약 10만t, 1984년 1만7237t, 1990년 889t으로 급격히 줄었다.

충남 아산에서 우리밀을 재배하는 이동형 충남로컬푸드 대표는 "우리나라는 1984년 정부 수매 공식 중단 이후, 종자도 구하기 힘들만큼 사라진 밀을 농부들이 어렵게 구해 파종한 끝에 그나마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반면 일본은 정부 보조금 제도가 있었기에 일정 생산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日 밀 자급률 유지 3대 비결… 정부 수매·보조금·연구개발

그렇다고 이 제도 하나로 일본이 모든 위기를 극복했다는 것은 아니다. 일본도 자급률 위기를 겪었다. 1994~1999년엔 자급률이 10%를 밑돌았다. 이랬던 일본이 2000년대 다시 10%대 중반까지 끌어올린 데는 빠른 정책 전환이 결정적 요인이 됐다. 일본은 1999년까지 시행하던 정부 무제한 수매 정책을 2000년부터 민간유통으로 전환했다.

이런 변화는 정부주도 밀 수매 정책이 개별 농가별 품질 관리를 어렵게 하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 소통을 원활하지 않게 한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추진됐다. 정부가 무제한 매입하는 제도로는 제분사 등 수요자 요구를 충족하기 어려웠다. 품질향상 노력이 부족하다는 문제도 있었다.

▲일본 도쿄 마츠야 백화점 지하 1층 일본 토종밀 전문 빵집 브레드 스토리. 매장 입구에 홋카이도산 토종밀로 빵을 만들었다는 푯말이 걸려 있다. [서창완 기자]

민간유통으로 전환된 2000년 이후 일본산 밀 대부분은 파종 전 계약에 따라 계획적으로 생산된다. 파종 전 판매 예정 수량의 일부를 입찰하고, 나머지는 입찰로 형성된 지표가격에 따라 거래 당사자 간 개별 거래한다.

이와 함께 수요에 맞는 밀 품종 개발과 재배기술 혁신, 품질 고급화애도 주력했다.  토종밀 품질이 향상되면서 외면하던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이는 다시 일본 밀 생산의 기폭제로 이어졌다.

10월4일 도쿄 치요다구에 위치한 농림수산성 농산국 회의실에서 만난 히가시노 아키히로 곡물과장은 "일본도 밀 재배에 적절하지 않는 환경이라서 품질이 안 좋은 밀이 많았다"면서 "연구개발을 통해 2000년대 초반부터 빵, 라면, 우동용 토종밀이 호주 밀과 차이 없을 정도로 생겨나 소비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생산량도 늘어났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민간유통으로 전환한 대신 농가에 경영안정자금을 지급했다. 이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토지이율작물이라 불리는 밭작물 보조금은 낮은 판매가격과 높은 생산비의 차액을 정부가 보전해 주는 제도다.

쌀 생산에서 밀로 전환할 때도 장려금을 지원하는 '논작물지급금' 제도를 여전히 운영 중이다. 히가시노 과장은 "밀을 포함해 전체 곡물 규모로 볼 때 올해 밭작물 직접 지급금 예산은 2058억 엔(한화 약 1조9952억 원), 논작물지급금 예산은 3050억 엔(한화 약 2조9569억 원)"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은 2000년대로 오면서 현재와 비슷한 수준인 20만~21만ha의 안정적인 경작 면적을 확보했다. 이후 일본 자급률은 10% 초중반대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 10월4일 일본 도쿄 농림수산성 농산국 회의실에서 UPI 취재진과 만나 일본 밀산업 정책에 대해 설명하는 히라노 켄이치 농산국 무역업무과장, 히가시노 아키히로 곡물과장.(왼쪽부터)  [송창섭 기자]

15%대 밀 자급률의 힘은 일본 도쿄 시내 여느 슈퍼마켓만 들어가 봐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10월5일 방문한 다이토구 마이 바스켓 슈퍼마켓을 살펴본 결과, 17종 밀가루 제품 가운데 7종에 일본산 밀이 원료로 쓰였다.

일본산 100% 제품은 3종, 미국 밀과 혼합된 건 4종이었다. '국내 제조'라고만 쓰여 있어 원산지 확인이 어려운 제품 6종, 프랑스산 2종도 갖춰져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 밀을 섞어 만든 밀가루는 2종에 불과했다. 구색 맞추기식으로 우리밀 제품 1~2개 전시해 놓은 한국 대형마트와 확연하게 달랐다.

일본이 무제한 수매와 민간 유통에 따른 보조금 등 밀 관련 정책을 진화시키는 동안 우리는 수입밀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문제가 되자 우리 정부는 2020년 2월28일 밀 산업 육성법을 제정하고 밀 자급률 확대에 나섰다. 그해에 1984년 이후 중단된 정부 밀 수매가 38년 만에 재개된 것이다.

하지만 보조금 개념인 직불금은 갈 길이 멀다. 우리 정부는 2023년도 예산안에서도 직불금을 현행 1ha 당 50만 원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농가 반발을 샀다.
 
제분사에 전권 준 韓, 국가가 공급 책임지는 日

수입 시스템에 있어서도 일본은 우리보다 더 체계적이다. 우리가 제분협회에 사실상 일임한 것과 달리 일본은 수입 밀 전량을 정부 주도 국영무역 형태로 들여온다. 이렇게 들여온 물량이 연간 약 550만t이다.

일본에서는 미쓰비시, 이토추, 미쓰이 등 수송선을 갖고 있는 종합상사와 정부가 수입밀 가격을 먼저 입찰한다. 가격 입찰은 매달 이뤄진다. 일본 정부가 들여온 수입밀을 제분회사에 파는 방식이다. 가격은 1년에 2번 정부가 결정한다.

히라노 켄이치 농산국 농산정책부 무역업무과장은 "중과세, 곡물운송가, 토종밀 보조금 성격인 '마크업'을 합친 최종 수입가를 제분업계에 제공한다"며 "일본에는 대형 제분회사 4곳을 포함해 66개 정도 제분회사가 있는데, 이들이 매달 조금씩 사기 어려우니 한꺼번에 나라가 사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나라가 밀 가격을 정한다'는 개념은 일본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난 6일 군마현에서 만난 한 우동집 주인 하시모토 류타로(68)는 "우리집 우동은 일본산과 호주산 밀을 함께 사용해 만든다"면서 "지난해 밀 값이 30kg당 500엔(약 4850원) 정도 올랐는데, 값을 정하는 건 나라니까 우리는 그냥 사서 쓴다"고 답변했다.

▲ 10월6일 군마현에서 만난 한 우동집 주인 하시모토 류타로(68)가 가게에서 파는 우동면 옆에 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창완 기자]


국내에선 대형 제분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불만이 높다. 대한제분, 사조동아원, 대선제분, 삼양사, CJ제일제당, 삼화제분, 한탑 7개 대형 제분사로 구성된 한국제분협회는 사실상 국내 밀가루를 거의 다 공급한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때는 현금을 갖고 와야만 대형제분사가 공급하는 밀가루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고 말했다.

국내 대표적 제빵회사 SPC삼립이 2012년 소형 제분사 밀다원을 인수한 것도 안정적인 밀가루 수급을 위해서다. 현재 SPC삼립은 계열사 밀다원과 대형제분사들이 공급하는 밀가루를 함께 쓰고 있다. 히라노 과장은 "일본에서는 제분업체들이 나라에 수입밀을 얼마나 사겠다고 신청을 해야 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사서 올 수는 없다"며 "각자가 살 수 있기는 한데, 그러면 막대한 관세가 붙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일본은 2014년 호주와 경제파트너십협정(EPA)을 맺고 향후 곡물 수출 금지 시 일본을 제외하는 조치에 합의했다. 미국 주도의 대(對)중국 견제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에 일본과 호주가 참여하고 있는 것도 곡물 수급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밖에도 일본은 1965년부터 밀 등 주요 곡물에 한해 비축제를 시행해왔다. 비축제는 일시적 물류장애에 대한 대응수단이다. 비축은 수송 장애, 선적 지연 등 일시적인 공급 지연 대비 차원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해상운송 분까지 감안하면 2~3개월치 비축양은 95만t가량 된다.

최지현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원장은 "우리가 확보한 밀을 호주나 미국 등 현지 비축하거나 국내 제분업체들에게 지원금을 주고 수입된 일정량의 소맥을 의무적으로 비축한 뒤 시장에 내보내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참고로 일본은 제분회사 상시 재고량이 평균 2.8개월가량 된다. 이중 1.8개월 치에 대해 정부가 제분회사에 보조금을 지원해준다.
 
해외 식량기지 만들어도 대형 제분사 외면하면 끝

현재로선 식량안보는 정부 주도가 정답이다. 무작정 민간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해외에다 아무리 대규모 수출 터미널(수출용 대규모 곡물저장 시설)를 많이 지어도 내수 시장에서 외면하면 그만이다. 한 해외 곡물 트레이딩 전문가는 "밀 수입 물량을 7개 대형제분사가 회원으로 있는 제분협회가 주도하기 때문에 우리 민간기업들이 해외에서 아무리 곡물을 많이 확보해도 국내 제분사들이 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 일본 군마현 타테바야시에 위치한 닛신제분 제분 공장. 닛신제분은 나루히토 천황의 모친 미치코 상황후 집안이 오너다. [서창완 기자]

실제로 포스코인터내서널이 최대지분을 갖고 있는 우크라이나 수출 터미널은 한해 유통 물량 20% 가량을 한국 수입량으로 정해놓았지만, 아직까지 전량 국내로 들여오지는 못하고 있다. 일각에선 국내 제분사들 외면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20년 기준 우크라이나 산 수입량은 미국, 호주산에 밀려 7%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