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의 시선] 우리밀 정책, 타이밍을 놓치면 안된다이상길 논설위원

  • 승인 2018.08.24 17:11

수입밀이 식탁을 점령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이 무상, 유상 원조로 제공되면서부터다. 

이는 기아를 넘어가는데 역할했지만, 값싼 수입밀은 국내 밀 생산기반을 무너뜨렸다. 1982년에는 아예 밀 수입이 자유화되고, 1984년에는 정부수매 조차 폐지되면서 1960년 33.9%이던 밀 자급률은 1990년 0.05%로 떨어졌다.


사라져 가던 우리밀을 살린 것은 국가가 아닌 농민들과 시민들이다.

 80년대 말부터 우리밀살리기운동(1991년 창립)을 전개하면서 미미하지만 자급률이 1.8%까지 올라갔다. 

우리밀 운동을 얘기할 땐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1989년 고향 보성에서 우리밀을 처음 생산하고,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를 만든 고 농민 백남기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되살아난 우리밀은 그러나 값싼 수입 밀만 사용하는 제분업체, 식품업체, 식당 위주의 농식품체계에서 배제되고, 정부의 정책적 무관심 속에 다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가고 있다. 

현장의 창고에는 올해 수매한 밀 외에 2017년산과 2016년산까지 재고로 남아있다. 

김태완 한국우리밀농협 상무는 “재고 증가와 장기보관에 따라 경영전반에 자금압박이 심각하다”며 “작년 수매대금도 반 밖에 드리지 못했는데, 올해 특단의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내년 수매계획을 또 줄이는 수 밖에 없다”고 호소한다. 농업소득이 적기 때문에 쌀과 2모작으로 밀을 재배해서 조금이라도 생활에 보태야 하는 게 밀 재배농민들의 형편이다. 


하지만 누적된 재고에 대해 비축관리를 그렇게 호소해도 정부에선 아무런 대책이 없다. 

최성호 구례우리밀가공공장 대표는 “당장 10월 중순이면 내년산을 파종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엇을 근거로 농사를 짓고, 수매 결정을 하겠느냐”고 묻고 “이런 식이라면 우리밀 기반이 다 파괴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리밀의 위기는 정책의 부재에서 심화되고 있다. 정부는 그동안 밀 자급률 수치만 제시할 뿐, 현장에서 요구해온 공공비축제를 비롯한 특단의 정책은 내놓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밀 자급률을 2022년까지 9.9%로 높이겠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 때는 목표가 2020년까지 15%였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에는 5.1%로 낮췄다. 

그러나 밀 자급률은 정부의 목표치와는 무관하게 수년간 1%대에 머물고 있고, 올해 0.8%로 떨어졌다. 이대로 가면 우리밀살리기운동이 시작된 시기로 되돌아간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이런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다. 


김인중 식량정책관은 “밀과 관련해 생산과 재배관리 등 품질향상, 수매비축과 관련 육성법 등 제도적인 기반, 중장기적으로 소비와 수요 대책을 세우고 있다”며 “현재 실무작업은 다 됐고, 국산밀 업계와 협의한 뒤 9월 중에는 대책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개호 장관은 국회에 있으면서 지난해 12월 27일 ‘국산밀산업육성법’을 발의한 당사자여서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이 장관은 취임사에서 “식량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식량자급률을 규범화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을 체계화해나가겠다”고 하고, “자급률이 낮은 밀산업을 적극 육성하겠다”고도 했다. 정부가 국산밀 대책을 마련하고, 정기국회에서 관련 법이 통과된다면 우리밀 농업은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개입으로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마련 할 수도 있다는 희망이 보이는 대목이다.


문제는 이런 대책들이 모두 내년부터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지, 당장의 재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밀업계는 주정용 공급을 요청했지만, 농식품부는 이미 또다른 과잉문제를 안고 있는 보리를 주정용으로 써야 한다며 난색이다. 현장에서는 진작부터 공공비축제 도입을 요구해왔지만 공공비축 예산은 2015년부터 번번이 기재부 반대를 넘지 못했다. 현장에서 요청해온 예산은 연간 1만톤을 비축할 수 있는 100억원 수준. 공공비축 예산이 수용되지 않자 농식품부는 올해의 경우 수매비축 예산으로 50억원을 신청했지만, 이것도 반영이 안되면 농안기금으로라도 해결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이 또한 내년 예산이어서, 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밀 관계자들의 속이 타들어 가고 있다.


정부도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기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밀을 쌀 다음의 주식으로 보고 절실하게 임한다면 문제는 풀릴 것이다. 

일본은 밀을 주요 식량으로 규정하고, 정부 수매는 물론 직불금, 종자개발, 홍보 등에 엄청난 예산을 투입, 밀의 자급률이 12~15%에 달한다. 이동형 우리밀생산자연합회 사무총장은 “우리나라는 밀 관세 4%를 0%로 낮춰 8개 제분회사가 연간 600억원의 감세 혜택을 보고 있다”면서 “수입 이익을 국산밀에 지원하는 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최성호 구례우리밀가공공장 대표는 “정부는 최저임금제와 관련, 노동자 인건비 3조원, 자영업자에게는 4500억원을 지원하면서 농민에게는 단 한푼의 지원도 없다”며 “획기적인 정책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우리밀 산업의 중장기 정책 법제화, 미축밀 관리제도, 우리밀 수매의 농협 시행, 수입밀과 우리밀의 가격차 해소 정책, 학교와 군 급식에 우리밀 이용 의무화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이개호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농정대개혁을 위해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이 가운데 우리밀 육성은 의원 시절 그가 스스로 제시하고 천착한 일인 만큼 정책을 체계화하는데 속도를 내주길 바란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당면한 재고문제 해결이다. 

이를 통해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우리밀운동의 숨통을 틔워주는 일이다. 

우리밀을 살릴 타이밍을 놓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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