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밀은 다 계획이 있구나…자급률 한국의 17배

한겨레21입력 2023. 12. 13. 18:38수정 2023. 12. 14. 11:48
[표지이야기]정부 주도로 예산 확보, 공급망 구축… 일본 밀이 자급률 17% 달성하고 수입밀보다 싼 까닭은
2009년 8월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밀밭 모습. 멀리 사리다케산도 보인다. 일본은 한국처럼 손쉽고 싸게 수입밀을 사먹을 여건임에도 ‘자국산 밀 소비 확대’라는 끈을 놓지 않았다. 2022년 기준 한국의 밀 자급률은 1%, 일본은 17%다. 위키미디어 제공

1984년 밀의 정부 수매를 폐지한 뒤 자취를 감춘 밀 정책이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되살아났다. 이때 밀 자급률 목표를 2017년까지 10%로 설정했다. 현실은 너무 달랐다. 2022년 한국의 국산밀 자급률은 1%밖에 되지 않는다.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밀 시장이라는, 한국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의 일본에선 자국산 밀은 17% 자급에 이른다. 한국처럼 손쉽고 싸게 수입밀을 사먹자고 하기 쉬운 여건이었지만, 일본은 ‘자국산 밀 소비 확대’라는 끈을 놓지 않았다. 일본이 어떤 방식으로 자국산 밀을 지켰는지, 일본 밀산업은 우리에게 여러 시사점을 준다.

대형 제분사가 일본 밀을 쓰도록 해

일본 밀의 자급률을 견인한 핵심은 역시 자국산 밀의 가격경쟁력 확보다. 일본의 대표적 밀 가격은 외국산 밀 5개 상품의 평균보다 싸다. 우리밀이 수입밀에 견줘 두세 배 높은 가격을 이루는 것과 확연한 차이다.(표1 참조)

일본은 1960~1970년대 대형 제분회사가 원료인 밀의 대부분을 수입밀로 대체하는 중에도 지속적으로 자국밀을 소비할 방법을 고민했다. 일본 정부는 식량안보 확보 차원에서 자국 대기업들에 자국산 밀을 소비해달라 고 요청했 다. 2014년 기준 일본 대형· 중소 제분회사의 자국산 밀 매수 상황은 이것이 오늘의 일본 밀 자급률 견인의 중요 수단으로 자리했음을 잘 보여준다. 일본의 대형 제분회사들은 증량제, 즉 수입밀을 기본으로 하되 밀의 양을 늘리는 용도로 자국산 밀을 섞는다.

대형 제분회사는 닛신제분 등 4개 제분회사를 말하는데, 일본 전체 밀 제분의 75.94%를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에 연간 3만t 이상 규모 제분회사까지 포함한 14개 회사로 범위를 넓히면 그 비중이 92%가 된다. 한국에서도 일부 농업계는 대기업 라면공장 등이 일부라도 국산밀을 써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형 제분회사들은 1960~1970년대 이후 생산설비를 수출입이 쉽게 임해 공장(바다에 가까운 공장)으로 옮기고, 원료 농산물로 수입밀 이용에 집중했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대형 제분회사들은 2014년 기준 원료 밀의 11% 상당을 자국산으로 메웠다. 이렇게 소비되는 자국산 밀의 양은 일본 전체 자국산 밀 소비의 62.52%를 차지한다. 대형 제분회사의 자국산 밀 수매가 일본 밀 자급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입밀에 올인하는 한국 대기업들과는 딴판이다.

생산설비와 규모 등에서 대형 제분회사보다 불리함에도 중소 제분회사들은 자국산 밀 100% 이용을 중심에 둔 제품 생산에 힘을 쏟고 있다. 밀농가 직접지불금으로 형성된 가격경쟁력이 가장 큰 힘이다. 2023년 11월 ‘우리밀세상을여는사람들’은 일본의 밀농가 직접지불금이 약 1조4천억원, 1ha 기준으로 600만원 이상(2021년 기준)에 이른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한국에도 전략직불제가 있지만 밀에 투입되는 돈은 2023년 기준 50억원이 되지 않는다. ha당 직불금도 50만원에 불과하다

국영무역으로 예산 확보, 일반예산도 지원금 활용

미군정으로부터 주권 회복 뒤 일본 정부가 밀 정책의 근간이 된 무제한 정부 수매 시기, 제분회사에 수입밀보다 낮은 가격으로 매도하던 것이 일본 밀 가격경쟁력의 출발점이었다. 이후 일본 밀산업은 2000년 ‘품질 제고를 통한 자국산 밀 수요 안정에 힘쓴다’는 목적에서 민간 유통 방식으로 대전환을 꾀했다. 이때 밀 제분업자 등 수요자가 이전 정부 매도가격과 같은 수준에서 입찰로 자국산 밀을 취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하지만 민간이 이전 밀 판매가격보다 훨씬 낮은 입찰가격(매도가격)을 제시하면서 밀 생산 농가는 소득 감소가 불가피해졌다. 일본 정부는 이 줄어든 만큼을 맥작경영안정자금(직접지불)으로 보충했다. 이렇게 2000년 이전 자국산 밀의 매입·매도 가격 차액으로 맥작경영안정자금이 주어진다는 구조가 형성됐다.(표2 참조)

일본은 항시 수입밀을 팔 때(매도) 가격이 수입밀을 살 때(매입) 가격보다 높다. 정부가 수입밀을 사들인 뒤 일정액의 국가 밀 장려금을 더해 실수요자인 제분회사에 판매(매도)하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 밀산업 육성자금에는 수입밀 매입·매도 가격 차액 외에 상당 규모의 일본 정부 일반예산까지 쓰인다.

일본이 밀농가에 이런 규모의 직접지불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밀·보리 수출입을 국영무역으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민간이 맡는 것과 달리 밀을 수입한 뒤 마크업(제품 원가에 부가한 금액, 이는 밭작물직접지불금으로 활용된다)을 덧붙여 제분회사에 수입밀을 판매하고 있다. 이를 통해 200%에 가까운 관세부과 효과를 내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직접지불교부금은 2022년 t당 약 11만엔에 이른다. 일본의 연간 밀 수입량을 480만t으로 가정하면 모두 5200억엔 정도임을 알 수 있다.

2021년 일본 자국산 맥류(밀·보리) 진흥비, 즉 밀산업 안정화 예산은 1421억엔 규모다. 외국산 밀의 매매차익, 즉 마크업을 통한 확보가 2021년의 경우 17.87%에 그쳤다. 나머지 1167억엔이 모두 일반예산으로 별도 지출됐다는 의미다.(표3 참조)

안정적 품질 바탕에 제품 수도 수천에 이르러

연도별 큰 편차가 있지만, 모든 연도에서 일반예산이 상당한 비중으로 들어갔다. 2012~2021년 10년 합산에서 외국산 밀의 매매차익은 59.91%에 그쳤다. 이 기간에 일본 자국산 밀 진흥비의 40.09%가 일반예산으로 채워졌다는 뜻이다.

일본 밀농가에는 밭작물직접지불금 외에 전략작물 차원의 논농업직접지불금도 별도로 있다. 논에 이모작으로 밀을 재배한 농가에 주는 돈이다. 이는 밭작물직접지불금과 비슷한 규모인데, 역시 별도의 일반예산이다.

일본이 한국 같은 수확이 이뤄진 뒤 재고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일이 없는 것은 계약재배이기 때문이다. 지역농협 중심의 생산자와 제분회사 중심의 수요자가 만나 파종 전 입찰하고 가격을 정한다. 이때 생산 의향 그리고 구입 희망량을 제시해 1차 생산 규모를 결정한다. 이 만남에서 간혹 생산·소비 불일치도 생겨난다. 그렇지만 생산이 소비를 앞설 때도, 생산자의 적극적인 판촉 그리고 제분회사의 추가 구매가 있어 최종적으로 재고 문제로 이어지지 않는다.

90만~110만t에 이르는 밀 생산량은 품질 좋은 상품을 개발하는 데도 힘이 된다. 일본 야후에서 ‘국산 소맥분(밀가루)’을 검색하면 그 상품 수가 8만 가지 이상 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고품질 밀에 대한 품종 개발 노력, 그리고 중화면용·빵용 밀 등의 가산점을 통한 고품질 생산을 독려한 결과다.

이러한 20여 년의 노력 끝에자국산 밀의 사용 형태가 변하고 있다. 일본 밀의 주요 연구자인 요시다 유키사토 지바대학 교수는 2006년 제분업계를 통한 조사에서 자국산 밀의 60~70%가 수입밀과 혼합 이용된다는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그렇지만 2022년 11월에는 자국산 밀의 단독 사용이 70% 이상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이런 결과로 최근 일본 밀의 생산면적은 미미하지만 우상향 구조를 보이면서 2010년 전후 12% 자급률이 2017년 이후 15~17%까지 올랐다.

제도는 수단일 뿐, 국민적 합의 중요해

필자는 5년 전쯤부터 일본 자료를 분석해 일본의 직접지불이 우리나라에 도입될 필요가 있다는 화두를 밀산업계에 던져왔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 일본 같은 제도가 없으니 예산 마련도 쉽지 않다”며 넘겨버렸다. 하지만 제도는 수단일 뿐이다. 국가 예산이란 어떤 형태로 마련되든 국가적 차원에서 국민적 합의와 부담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궁색한 변명일 수밖에 없다. 일본 역시 밀농가 직불금을 마련할 때 국영무역의 마크업으로 확보한 예산보다 더 큰 규모의 일반예산이 더해졌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송동흠 우리밀세상을여는사람들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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